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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안의 종교 ‘가톨릭’

笑山 박보영 2013. 5. 14. 21:48

열한 번째 이야기

우리 집안의 종교 가톨릭

나는 박씨 집안에 종손 중에도 맏아들로 태어나 자랐지.

유교를 숭상하는 집안이라 조상들의 제사를 모시는 것을 당연시하며 자랐단다.

그러나 제사로 말미암아 혹사 당하는 할머니 그리고 결혼하니 엄마 또한 마찬가지더라.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나쁜 것은 아니지.

왜냐하면 나의 존재는 분명 조상들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고 조상들 덕분에 지금 나로서 생활할 수 있으니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기일을 지키며 제사를 지내는 것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고민들을 하며 자랐단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생을 바쳐야겠다는 생각으로 교육대학교를 갔단다.

교육대학교를 다니면서도 교육을 고민하면서 바른 교육자, 이 사회에 공헌하는 교육자, 바로 네가 이야기한 존경받는 교육자가 되는 길을 고민하며 2년의 대학생활을 했단다.

이때 종교를 고민하였다.

내가 바른 교육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움도, 또 고난과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옛날에 독립운동을 했던 위인들은 그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하지 않았던가?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유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었지.

그러던 시기에 첫 발령을 받고 교직생활을 하던 중 뜻하지 않은 유혹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교직을 그만둘까도 생각했었지.

그래서 1969년 여름 가나안농군학교에서 15일 교육을 받고 본분이라는 단어와 대립되는 단어에 대한 철학을 깨닫게 된단다.

그리고 종교를 기독교로 가져야겠다며 교회에 3년간 다녔지.

그런데 내 생각에 교회는 아니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교회는 절대 안 된다고 가족회의를 소집하기도 했단다. 다만 천주교를 택하는 것은 허락한다기에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그것은  조상님들께 드리는  제사를 허용하는 이유때문이지. 그 후 약 17년이 흐르고 결혼도 하고 오빠와 너도 태어났지. 그때도 별 종교는 갖지 않았단다.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더구나. 고통을 주시면서 나를 부르신 것 같았다.

포항으로 이사 가서 바로 성당에서 교리를 받고 1987322일에 세례를 받았지.

또 다른 이유 한 가지는 외할머니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하시는 것을 보고 더욱 강하게 천주교를 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신앙생활은 나의 노력에 비례해서 성숙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지금은 너에게도 자신 있게 말하건대 내 인생에서 잘한 세 가지를 말할 때 천주교인이 된 것을 꼽는 것이다.

이제 더 노력하는 것은 내가 죽을 때 기쁨 속에서 천국의 희망을 가지고 성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눈을 감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좋은 것을 남에게 주고 싶은 마음에서 너나 오빠 그리고 사위에게 천주교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강요한다고 받아들이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