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 kain, 신부님 밥 먹어요!"

필리핀 나보타스 빈민촌에서 일하는 김홍락 신부..

가난의 영성 다시 주목해야

 

한 사제의 귀한 땀방울이 필리핀의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오늘의 글은 좀 길지만 끝까지 읽고 도움을 주면 어떨까요?

저는 외부 초청 강의를 하고 강사료 수입의 일부를 보내고 있어요.

함께 해 주면 어떨까요? 

                           (가톨릭뉴스의 한상봉 기자의 글을 그대로 옮긴다 )   isu@catholicnews.co.kr

한 사제의 귀한 땀방울이 필리핀의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필리핀 현지 법인인 '팜파갈락 가톨릭 미션'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김홍락 신부(프란치스코, 44세)다. 김 신부는 도미니코회 출신으로 지금은 필리핀 칼로칸 교구의 빈민사목 협력사제로 일하고 있으며, 나보타스 빈민촌에서 살면서 산 비센테 페레스 공소를 중심으로 교육사업과 장학회를 꾸리고, 최근엔 의료조합을 준비하고 있다.

김홍락 신부는 광주교구 신학생 시절에 부제품을 앞두고 교구를 떠났다. 당시 자신은 "본당사목에 자신이 적절한지 의문을 느꼈으며, 본당사목이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는데, 그렇다고 은둔형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당시 교구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와도 상의하고 수도회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예수회의 송봉모 신부의 소개로 광주 윤 대주교와 광주가톨릭신학교 학장 신부의 추천서를 들고 도미니코수도회를 찾아가 입회했다. 

그곳에서 내 영혼은 더 편안했다

   
▲ 김홍락 신부(사진/한상봉 기자)
도미니코회에서 종신허원을 하고, 필리핀으로 유학을 갔던 것이 필리핀의 빈민들과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김 신부는 도미니코회의 요청에 따라 필리핀에서 교부신학과 전례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논문 마무리 과정에서 나보타스 본당을 방문해 빈민촌을 돌아보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서술한 판잣집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현장을 잊을 수 없엇다. 그래서 그후 3년 동안 방학이나 휴가를 이용해 틈틈히 이 지역 빈민촌을 현장체험했다. 2008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공부를 마칠 무렵에 그가 느낀 소회는 이러하다. 

"이제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면 학생들과 더불어 분필을 만지면서 교수생활을 하게 될 텐데, 강단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빈민촌에서 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육체는 좀 힘들더라도 더 내 영혼을 평온하게 만든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면.. 그 사람들을 알지 못했다면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그들을 못 본 척 하기가 힘들었다. 사제의 양심에 걸렸다. 그래서 우리 돈으로 80만원을 달러로 환전해서 들고 빈민촌으로 들어가 버렸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산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수도회측과 해결책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빈민사목에 투신하는 것은 결국 도미니코회에서 맡긴 소임과 너무 다른 선택이었기 때문에 퇴회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퇴회 문제는 아직도 교황청에서 수리과정에 있다.

김 신부는 먼저 나보타스 지역을 맡고 있는 칼로칸 교구의 데오그라시아스 이니게스 주교를 만났다. 주교는 단박에 "위험한 지역'이라는 이유로 반대의사를 표명했지만, 당장에 어려운 교구 형편으로 재정적 지원을 할수는 없다는 단서 아래 교구 빈민사목 협력사제로 일하는 것을 허락했다.  

처음엔 밥도 주지 않았다

나보타스의 빈민촌에서 구한 집은 젖은 땅 위에 막 짓고 있는 블럭만 쌓아놓은 집이었다. 이 집을 임대해서 살면서 집을 마저 지었다. 물도 없고 문도 없는 집이어서 벌레 때문에 고생이 심했다. 바닥에는 공사에 쓰던 합판을 깔고 잠을 청했다. 한 가톨릭 사제가 허름한 움막같은 집에서 살기 시작하자, "신부라고는 하나 믿을 수 없다. 신부가 본당을 두고 왜 여기 와서 사는가?"하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더니, 결국 "한국에서 죄 짓고 벌 받으러 이곳에 들어왔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이 보기에 이 마을은 '사제가 벌 받기에 안성마춤인 동네'였다.

그 집에서 김홍락 신부의 빈민운동이 시작되었다. 책상 2개를 놓으면 꽉 들어차는 그 집이 숙소이자 사무실이었다. 한국에 방문해 후원회도 만들었다. 첫달에는 8명의 후원자가 8만원을 보내주었다. 한국에서 김홍락 신부를 아는 친척이나 수도자, 선후배 사제들은 입을 모와 반대했다. 그동안 공부한 게 아깝다며 "미쳤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때 나이 사십이었다. 이때 느낀 것은 "일을 하려 해도 열정만으론 안 되고 체력이 있어야 한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시작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더 앞서 나갔다.

   
▲ 사진출처/기쁨과 희망 카페

그러나 정작 나보타스 빈민촌 사람들은 김홍락 신부에게 밥도 주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떻게 자기들이 먹는 음식을 사제에게 줄 수 있느냐"는 죄송스러움 때문인 것을 알았다. 필리핀 사람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으며, 사제에 대한 존중심 때문에 안남미에 생선 한 마리 얹은 헐한 음식을 내줄 수 없었던 것이다. 빈민촌 사람들은 어둑컴컴한 집에서 밥을 먹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 골목에 나와서 밥을 먹는데, 김 신부 역시 골목길에 주저않아 그네들의 음식을 먹었다. 그것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러면 주민들이 몰려와 '헐한 밥을 먹는 사제'를 구경했다. 그때 김 신부는 "이제야 이들과 사귀게 되는 가 보다"하고 눈물이 왈칵 나올 정도로 감사했다. 밥을 먹고 필리핀산 값싼 콜라를 사다가 대접하면 주민들은 아주 좋아했다. 

그후로 사람들은 골목에서 밥을 먹다가 김 신부가 지나가면 "파더 케인!(father, kain)"하고 불렀다. "신부님, 밥 먹어요!"하는 말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식사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배고프면 먹고, 먹을 거리가 있을 때 먹는다. 그게 버릇이 되어 김 신부는 그들처럼 지금도 하루에 두 끼밖에 먹지 않는다. 음식과 관련해 김 신부가 정한 원칙이 있다. 현지에선 절대 한국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이 먹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음식이란 배부르면 되고, 자신이 특별히 선택할 수 없었다. 실제 필리핀 빈민들은 뭐든지 배가 부르면 음식이 남더라도 더 먹지 않고 손을 놓는다. 그들에게 즐기기 위한 식사는 없다. 다만 배고파서 먹는 것이다. 

4개월째 노상 천막생활에 돌입한 사제

   
▲ 사진출처/기쁨과 희망 카페
김홍락 신부가 이 지역에서 일한 지가 벌써 4년차에 들어선다. '팜파갈락 가톨릭 미션'이라 부르는데, 나보타스 지역의 산 비센터 베레르 공소가 이 빈민운동의 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김홍락 신부가 처음 이 지역에 들어왔을 때, 공소는 50년이 넘은 버려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한국 내 후원조직인 (사단법인)'기쁨과 희망'의 후원을 받아서 김 신부가 직접 시멘트를 져나르고 공사를 해서 2009년 10월에 3층으로 증축된 공소의 축복식을 가졌다.

이 공소는 현재 1층은 공소 겸 유치원으로, 2층과 3층은 사무실과 교실로 쓰고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빈민학생 장학사업과 문맹자 야학, 초중고등학교 과정, 빈민아동 공부방 등을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혜택을 받은 학생들은 128명 정도이며, 그중에서 28명은 인근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통상 국공립대학은 1학기 수업료가 우리 돈으로 14만원 정도 한다. 필리핀에서는 초중고등과정은 무상교육이지만, 가구당 하루 100페소로 연명해야 하는 주민들은 자녀들에게 줄 교통비도 없고, 학용품도 댈 수 없는 형편이다. 어찌보면 교육만이 유일하게 현실을 타개해 갈 수 있는 자산인데, 그래서 김 신부는 교육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최근에 김홍락 신부는 4개월 째 노상에서 천막생활을 하고 있다.  나보타스 시에서 판잣집조차 마련할 수 없는 빈민들은 도로가 깔린 다리 밑에서 천막생활을 하는데, 시 당국에서 천막을 철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유지에 대한 불법거주자들을 단속하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맨땅에 천막을 치고 바닥에 합판을 깔고 지내는데, 인근 가게에서 수돗물을 사다가 식수와 목욕물을 공급한다. 그런데 어느날 철거과정에서 철거반원들이 철거한 천막과 가재도구를 불사르는 바람에 김홍락 신부가 이들 철거민들과 함께 노상에 천막을 치고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후로 천막을 불태우는 일은 없어졌지만, 김홍락 신부는 밤마다 3톤 화물차가 머리 위에 있는 다리를 지나가면서 뿜어내는 먼지와 소음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은 현재 철거반원이 오면 천막을 걷었다가 그들이 돌아가면 다시 그 자리에 천막을 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또한 '마이크로 크레티트'(소액대출) 운동도 전개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대신 사 주고, 매주 얼마씩 갚아나가도록 하는 일이다. 인근 지역에서는 500페소를 빌리면 한 주만에 이자가 붙어 600페소를 받아가는 사채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더 가난해지는 일이 흔했다. 여기에 문제의식을 느낀 김홍락 신부는 소액대출운동을 통해, 그 빚을 대신 갚아주기도 하고, 생활상 꼭 필요한 물품을(돈으로 주지 않는다) 사주고, 매주 100페소 정도의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을 본인들이 갚아가도록 돕는 운동이다.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

   
▲ 사진출처/기쁨과 희망 카페
그러나 이런 일을 계속 혼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필리핀의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했다. 그래서 준비하고 있는 것이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다. 함께 일할 사람들을 양성하고 더불어 일하자는 것이다. 우선 평신도 활동가들을 찾아보고 있다. 이 공동체는 빈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로 여기고 그들의 종이 되어 섬기자는 모임이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쉽지 않았다. 먼저 평생 어렵게 살아온 이들에게 다시 가난 속으로 들어가자고 설득하는 게 어려웠다. 

그래도 이 공동체는 포기하지 못할 원칙을 세워두고 있다. 절대 부동산을 소유하지 않고 나그네 영성으로 살자는 것이다. 돈이 생기면 그 돈으로 도울 곳을 찾자는 것이다. 지금 거주하고 있는 공소 역시 교구에서 10년 계약으로 빌린 공간이다. 주변에선 쉴 공간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있었지만, 공동체 소유의 공간이 없더라도 다른 피정센터에 가서 쉬다 오면 족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처음엔 작은 필요 때문에 작은 공간을 소유하게 되지만 결국 이러다 보면 재산이 늘어나고 본래 정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정적 여유가 생기면 연말에 남은 잉여재산을 모두 복지기관에 기증하거나 주민들에게 돌려줌으로써 새해는 다시 제로(zero) 상태에서 시작하자는 생각이다. "우리는 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자고 하면서도 그대로 살지 않는다. 그것은 말만 할뿐 그분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김홍락 신부의 이런 생각은 '가난'에 대한 학문적 천착과 성찰에 기반한 것이다. 그는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학사논문을 시작으로, 석사논문은 "축성된 가난의 신학적 의미"를 밝혔으며, 박사학위 논문은 요한 카시아노 성인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행업 안에서 가난의 역할"을 탐구한 것이었다. 그는 특별히 도미니코회 출신인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카시아노의 영성을 간직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벗어버림'의 영성이다.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은 채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려면 우리 자신도 기존의 온갖 장식과 편견과 재산, 아집에서 벌거벗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벌거벗음의 사회적 표현이 '가난'이다. 

   
▲ 사진출처/기쁨과 희망 카페

당신의 1페소가 저들에게 꿈을 만들어 줍니다!

김홍락 신부가 필리핀의 빈민들을 돕기 위해 2008년에 만든 후원조직 (사단법인)'기쁨과 희망'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기쁨,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다. 매년 한국에서 청년봉사단을 모집해 필리핀 현지에서 현장체험을 겸해 봉사활동을 하도록 이끌고 있으며, 후원방식 역시 일시불로 큰 돈을 주는 것은 사양하고, 매달 한번씩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며' 소액이라도 후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이러한 차원에서 "Piso mo, Paugarap Ko"(당신의 1페소가 저들에게 꿈을 만들어 줍니다!)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쩌다 한번 내는 자선이 아니라, 1페소라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철저한 가난에 대한 김홍락 신부의 감각은 그의 부친인 김동혁 옹에게 받은 감화 덕분이다. 김홍락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을 때 부친은 '사제로서 지켜야 할 세 가지'를 일러 줬다. 첫째는 여자문제라면 몰라도 절대 돈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것. 둘째, 본당에서 신자들 가운데 마지막 한 사람까지 골프를 치게 되면 맨 마지막으로 골프를 쳐도 좋다. 세째, 마지막 신자까지 자동차를 가질 때까지 절대 차를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김홍락 신부는 부친의 부탁을 염두에 두고 살고 있으며, 하루에 두 끼 이상은 먹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김홍락 신부는 "이제는 우리 교회가 교풍(敎風)운동을 일으킬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김 신부가 말하는 교풍운동이란 교회쇄신 운동이다. "최근 각 교구마다 시노드를 열고 있지만, 결과물로 책만 한 권 내고 있을뿐 실천할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사제도 수도자도 자기반성을 할 때가 왔다"면서, "전통적으로 교회가 물질적으로 타락할 때마다 가난을 중심으로 쇄신운동이 일어났다. 맨발의 카르멜이 그렇고 프란치스코가 그랬다"고 아프게 지적했다. 

* 필리핀의 빈민을 위한 소식을 알고 싶거나 후원을 원하시는 분은 국내 후원단체인 <기쁨과 희망> 인터넷 카페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http://cafe.daum.net/joyandhope)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Posted by 토론은 게임이다. 바로 대립토론! 笑山 박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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