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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공부하는 토론게임 (대립토론)

대립토론으로 키워진 인물 탐색 -4

대립토론으로 키워진 인물 탐색 -4

 

 

Franklin D. Roosevelt (프랭클린 루스벨트)

뉴욕주() 하이드파크 출생. 하버드대학교를 졸업, 1904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며, 1907년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1910년 뉴욕주의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T.W.윌슨의 대통령선거를 지원해주고, 19131919년 윌슨 정부의 해군차관보로 임명되어 제1차세계대전을 통하여 활약하였고, 베르사유회의에 수행하였다. 1920년 민주당 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대통령후보인 J.M.콕스와 함께 국제연맹 지지를 내걸고 싸웠으나, 공화당 대통령후보인 W.G.하딩에게 패하였다. 그 후 다시 변호사로 일하며 보험회사에도 관계하였으나, 192139세의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렸다. 치료 후 체력이 회복되자 1924년 정계로 복귀하였다. 1928년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어 2()를 재임하였다.

 

193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자, 그 지명수락연설에서 뉴딜(New Deal)’을 선언하였다. 1929년 이래 몰아닥친 대공황으로 천 수백만에 달하는 실업자를 배출하고 있던 당시 미국의 사정으로서는 뉴딜을 대환영하였고 마침내 H.C.후버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대통령 취임 후에는 강력한 내각을 조직하고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뉴딜정책을 추진하였다. 통화금융제도의 재건과 통제, 산업 특히 상공업의 통제, 농업의 구제와 통제, 구제사업과 공공사업의 촉진, 정부재정의 절약 및 행정의 과감한 개혁 등으로 성공을 거두어, 국민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외교면에서는 소련의 승인, 필리핀의 독립과 함께 호혜통상법(互惠通商法)을 제정하게 하고 공황의 원인이 되었던 국제무역의 불균형을 시정하였고 라틴아메리카 제국(諸國)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선린외교정책(善隣外交政策)을 추진하였으며, 먼로주의를 미국만의 정책으로 삼지 않고 아메리카주() 전체의 외교정책으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936년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19403선되었다. 1935년 유럽 정세가 악화됨에 따라 중립법이 제정되었지만, 원래 국제주의자였던 그는 고립주의를 억제하여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후에 적극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원조하였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眞珠灣)공격을 계기로 참전하였다. 대서양헌장의 발표를 비롯하여 카사블랑카카이로테헤란얄타 등의 연합국 회의에서 전쟁의 결정적 지도권을 장악하여 영국의 총리 W.L.S.처칠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지도적 역할을 다하고 전쟁종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4년 대통령에 4선되고 국제연합 구상을 구체화하는 데 노력하였으나, 19454월 세계대전의 종결을 보지 못하고 뇌출혈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