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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담은 열 아홉번째 이야기-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고통인들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고통인들
나만큼이나 하겠는가?

     세례 받던 날 외할머니께서 선물로 주신 작은 액자를 지금껏 간직하며 집안의 기도소에 놓고 기쁠 때 바라보며 기뻐했고,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서 인간적으로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이것을 바라보며 고통과 어려움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해결할 수 있었다.

지금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해온 것이 어언 20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신앙적인 습관이 되었다. 고요할 때 이를 보며 찬송하게 되었다. 외로울 때면 기도하곤 하였다.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 닥치면 주님을 보게 된다. 이제는 아끼는 액자가 되었고 성모상 옆에 놓고 늘 바라보며 묵상하곤 한다.

그 액자에는 십자고상이 있고 옆에는 다음과 같이 써져있다.

 

고요하면 찬송하라,

외로우면 기도하라,

괴로우면 주를 보라.

 

이 액자의 글을 시집가는 수지에게 보낸다.

기쁠 때 어떻게 하니?

한없이 괴로울 때 어떻게 하니?

십자가에 매달려 고개를 떨구고 계신 주님을 보며 기도하여 보라.

주님을 보며 대화하여 보라.

나는 십자고상을 좋아하고 있다.

사는 일이 어렵고 힘들 때 묵묵히 십자고상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내가 무슨 대단한 신앙생활을 해서가 아니고 그저 바라보며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십자고상을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큰 위안을 받게 된다.

그래서 우리 집 안방이나 거실뿐만 아니라 직장의 책상 위에도 십자고상은 항상 놓여있다.

어느 때는 나에게 다가오셔서 자네의 고통이 아무리 견디기 어렵다 한들 어디 나만큼이나 하겠는가? 십자고상을 바라보면 예수님은 늘 내게 그렇게 말해주시곤 한다. 어떤 때는 십자고상을 바라보고 묵상하고 있으면 슬며시 십자가에서 내려와 내 어깨를 몇 번 툭툭 치고는 다시 슬며시 십자가에 매달려 고개를 떨구시는 것을 느끼곤 한다.

나는 한때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괴로워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대화를 하려 해도 분심만 생기고 대화할 수 없더군.

아직 나에게는 신앙심이 부족한가 아니면 기도하는 방법을 몰라서일까, 나를 몰라주시는 것일까,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일까? 하며 아무리 기도하고 묵상하려 하지만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고 대화할 수 없어 애태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묵상하는 시간마저 아까울 때가 있어서 십자고상에 달려 계신 예수님을 원망도 해보았다.

또 어느 때는 그를 미워한 적이 있었다.

언제나 완전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너도 나와 같이 하라고 억압하는 것 같아 싫었다.

용서와 사랑의 구체적 표상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여유만만하게 웃고 계신 것 같아 그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이 글을 읽는 수지야,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십자고상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마다 예수님은 특별히 나를 사랑하시는 것 같아 기쁘다.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 같아 한없이 주님을 닮고 싶은 마음이 살아난다.

비록 주님께서 나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시는 방법으로 나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늘 나와 함께 있어주셔서 외롭지 않다.

오늘도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주님을 생각하며 너에게 이 글을 쓴다.

십자고상에 달려 계신 주님은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하여 끊임없이 은총을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다.

꼭 그렇게 해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