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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아무리 견디기 어렵다 한들 어디 나만큼이나 하겠는가?"

 

"고통이 아무리 견디기 어렵다 한들 어디 나만큼이나 하겠는가?"

세례 받던 날 장모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작은 액자를 지금껏 간직하며 집안의 기도소에 놓고 기쁠 때 바라보며 기뻐했고,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서 인간적으로 도저히 해결 될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이것을 바라보며 고통과 어려움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해결할 수 있었다. 지금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해온 것이 어언 20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신앙적인 습관이 되었다.

고요할 때 이를 보며 찬송하게 되었다.

외로울 때면 기도하곤 하였다.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 닥치면 주님을 보게 된다.

이제는 아끼는 액자가 되었고 성모상 옆에 놓고 늘 바라보며 묵상하곤 한다.

그 액자에는 십자고상이 있고 옆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고요하면 찬송하라,

외로우면 기도하라,

괴로우면 주를 보라

 

이 액자의 글을 읽는 모두에게 드린다.

여러분

여러분은 기쁠 때 어떻게 하나요?

한없이 괴로울 때 어떻게 하나요?

십자가에 매달려 고개를 떨구고 계신 주님을 보며 기도하여 보세요.

주님을 보며 대화하여 보세요.

저는 십자고상을 좋아하고 있.

사는 일이 어렵고 힘들 때 묵묵히 십자고상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내가 무슨 대단한 신앙 생활을 해서가 아니고 그저 바라보며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십자고상을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큰 위안을 받게 된. 그래서 우리 집 안방이나 거실뿐만 아니라 직장의 책상 위에도 십자고상은 항상 놓여 있다.

어느 때는 저에게 다가와서

"자네의 고통이 아무리 견디기 어렵다 한들 어디 나만큼이나 하겠는가?" 십자고상을 바라보면 예수님은 늘 내게 그렇게 말해 주시곤 한다.

어떤 때는 십자고상을 바라보고 묵상하고 있으면 슬며시 십자가에서 내려와 내 어깨를 몇 번 툭툭 치고는 다시 슬며시 십자가에 매달려 고개를 떨구시는 것을 느끼곤 한다.

저는 한때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괴로워 한 적이 있었.

아무리 대화를 하려해도 분심만 생기고 대화 할 수 없더군요.

아직 나에게는 신앙심이 부족한가 아니면 기도하는 방법을 몰라서 일까,

나를 몰라주시는 것일까,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일까 하며 아무리 기도하고 묵상하려 하지만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고 대화 할 수 없어 애태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묵상하는 시간마저 아까울 때가 있어서 십자고상에 달려 계신 예수님을 원망도 해 보았다.

또 어느 때는 그를 미워한 적이 있었.

언제나 완전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시고 너도 나와 같이 하라고 억압하는 것 같아 싫었.

용서와 사랑의 구체적 표상을 완벽하게 보여 주고 여유 만만하게 웃고 계신 것 같아 그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

십자고상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마다 예수님은 특별히 나를 사랑하시는 것 같아 기쁘지요.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 같아 한없이 주님을 닮고 싶은 마음이 살아난다. 비록 주님께서 저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시는 방법으로 나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늘 나와 함께 있어 주셔서 외롭지 않다.

오늘도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주님을 생각하며 모두에게 이 글을 바친다.

십자고상에 달려 계신 주님은 이 세상 끝날까지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은총을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

꼭 그렇게 해 주실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