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笑山박보영 이야기/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아버지/아들의 마음나누기(30)

58일 일요일 27일째

<환희의 신비 1 감사>

기상 : 4:56

출발 : 6:46 도착 : 12:00

Tricastela -> Sarria 21km (5시간 14분)

날씨 : 흐리고 비를 뿌리는 듯했다. 하지만 포근하다. 오후 들어 햇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따뜻하다.

갑자기 1시경 비를 뿌리다 햇빛이 나는 변덕스런 날씨다.

<숙소>Puente Ribeira

<순례길의 풍광>

비온 후 흐린 날씨에 모든 길은 젖어있다. 동네 길에서 나와 갈림길이 있었다.

26km 들길+오솔길과 18km 숲길을 택할 것인가?

18km 숲길을 택하였다. 산길의 오르막길 내리막길 전 구간에서 걷는 동안 새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하지만 너무 아름답고 아름답다. 새소리의 천국이 따로 없다.

오르막의 정상에 있는 순례길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풍광이다.

멀리 광활하게 펼쳐진 풍광은 좁은 나라에 사는 나에게는 황홀 그 자체라고나 할까. 18km라서 여유로운 자세로 감상할 수 있어서 더욱 평화롭다. 행복하다.

다만 아들과 나만 감상할 수 있어 집에 두고 온 가족이 그리워진다. 가족이 함께 와서 걸으며 이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순례길을 걷는 자만이 볼 수 있고 비온 후 쾌청한 날씨에만 볼 수 있으니 행운이다. 아니 우리 부자에게 내려준 축복이다

순례길에서 풍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묵상 주제 : 어버이날에 생각하는 어버이>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여느 날과 달리 어버이에 대하여 생각한다.

고국에서 보내온 사랑하는 부인에게서 온 카톡에도 “오늘 문득 생각나는 게 어버이날이라고 부모님께 진정 고맙다고 생각한 적이 있나? 하는거 생겨야하는 또 하루일뿐. 힘든데 왜 이리 챙겨야 하는 게 많은 거라고 생각하기만 하지 않았나? 내가 좀 메말랐나? 다들 그런가?”

어버이 중에 어버이 신앙인의 한사람으로 성모님을 생각한다.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때나 예수님을 낳으시고 생활하시면서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당하시면서 얼마나 크고 아픈 고통을 겪으셨을까? 어버이로서 나는 어떠한 희생과 고생을 감수하는 생활을 하였을까?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과연 나는 얼마만큼 그 도리와 역할을 했는가?

순례길에서 맞은 어버이 날에 깊은 생각에 젖는다. 그리고 훗날 어버이로서 삶을 어떻게 할것인가?

그 답은 찾을 수 없고 기도하고 노력하고 순례길에서 갖는 지금의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더 나아가 모든 어버이들이 자식사랑과 함께 자식으로서의 부모님께 해야 할 도리라고 할까 은혜를 보답하는 것도 중요한 사안이다.

나는 정말 부모님께 드리지 못한 은혜 지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가슴이 미어짐을 참을 수 없다. 순례길에서 느끼는 어버이날의 감정은 그 여느 때와 다른 것은 왜 그럴까?

 

<오늘의 주제 : 선택>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선택의 연속이 아닐까?

몇 시에 일어날까? 일어나서 무엇부터 할 것인가? 아침은 무엇을 먹을까? 몇 시에 출발할까? 우비는 입을 것인가? 등등...

모든 일이 선택에서 출발해서 하루의 일이, 선택으로 이어지며 하루를 맺는다. 특히 오늘 순례길은 처음으로 갈래 길을 맞는다. Sarria로 가는 길이 두 갈래 있다. 26km길과 18km길이다. 수도원을 들르는 길이 26km의 길이다. 18km의 길은 짧은 숲길이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아들과 의논하여 26km길로 가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으며 “그냥 18km길로 가요. 이곳에도 볼 것이 있데요.” 아들의 말이다. 아들의 발 상태가 말이 아니다. 통증으로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다. 처음으로 아들과 다른 길을 걸으며 홀로서기를 하고 깊이 생각할 거리를 갖고자 했는데 막상 아들이 제안을 한다. 나는 선택 했다. 18km 숲길로 아들과 함께 걷기로 했다.

갈림길에서 강동구에서 오신 아주머니 두 분이 있어, “어느 곳으로 갈것인가?” 우리는 18km로 간다고 하였더니 아주머니들 말씀은 그 길이 힘들다던데요.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니 짧더라도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여 오늘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하고 걷기 시작했다.

출발부터 아름다운 새소리, 계곡의 물소리 너무 좋았다.

조용히 서서 그 소리들을 녹음기에 담았다. 어리석은 일이다. 그 아름다운 소리를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곳을 뜰 수가 없었고 계속해서 걸을 수가 없었다.

비에 젖은 계곡 길을 걸으며 산길로 이어진다.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새소리, 물소리도 잘 어울려 내 귀에 자연의 교향곡으로 들려온다.

어찌 인간이 만드는 음악이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따라 갈 수는 있겠는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자연교향곡이다.

산길의 풍광, 오르막을 올라 저 멀리 펼쳐지는 푸르르고 아름답고 청명한 풍광을 보면서 역시 이 18km의 숲길 선택을 잘했구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우리의 삶에서 선택은 중요하다. 선택에는 반드시 전제조건이 있다. 사전에 잘 검토해야 하고 선택 후에는 후회가 없어야한다. 다만 선택 후 수정을 하더라도 경과 후에는 선택자체를 후회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선택에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새삼 느끼게 된다.

 

<아버지/아들의 마음 나누기>

26km길이냐 18km길이냐 하는 것을 선택하는 날이다. 아들은 발의 통증으로 18km길을 갈수 밖에 없었다. 아들이 가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쑥스럽고 어색함을 참지 못하는 아들의 성격 탓에 간접적으로 어버이날 축하인사를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뜻을 읽을 수 있다. 길을 걸으면서 이 길을 선택하여 아들과 함께 가기를 잘했다. 경관이며 새소리며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이며 아버지로서 행복감을 느낀다.

이 길로 가기를 잘했다고 하니 “또 다른 길에 더 좋은 일이 있을 줄 알아요.” 한다. 그렇지만 나의 마음은 이 길이 더욱 좋게 생각되었다.

Sarria의 pension에 도착하여 보니 어느 숙소보다도 좋았다. 다시 한 번 아들의 숙소 선택하는 능력에 감탄한다. 어버이날 아들에게서 느끼는 감탄스런 날이다. (작은 불협화음이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 밖에 나와서 보니 추웠다. 잠시 숙소에서 잠바를 가지러 가고 나에게 화살표를 따라 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쪽으로 오세요 라고 듣고 숙소에 가서 옷을 가지고 급히 나왔는데 아들이 없었다. 우왕좌왕 찾아 헤매다 나중에는 이상한 생각(사고가 아닌가)까지 생기니 더 불안하였다. 이곳저곳을 다니다 숙소로 와서 카톡 생각이 났다. 카톡으로 보이스톡을 하니 성당의 미사시각을 알아보기 위해 갔다는 것이다. 서로 소통이 안 되어 큰 마찰이 있을 뻔하였다.

나는 마음을 달래고 나의 잘못, 오해 등을 이야기하며 사과했다. 반성하고 아들의 이야기도 듣고 일단락되었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는 허전함이 있는 것은 왜일까?

더구나 어버이날인데… 주님 왜 이러십니까? 하기도 하였다 (-> 잘못했습니다, 악마의 짓이겠지요?) 오늘 아침부터 숙소에 도착 할 때까지 행복감, 또 오면서 마드리드 청년, 산티아고에서 온 친구, 벨기에에서 온 아가씨를 우연히 또 만났다. 순례길에서 같은 사람들을 3번째 만남이었다. 어찌나 반가운지 마음에서 우러나는 반가움 기쁨 정말 가족 같은 친근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들은 이번 순례길에서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중에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인연은 이렇게 우리들을 가깝게 만들었다. 아들의 절뚝이는 다리를 보고 Sarria 도착 40분전에 카페 앞에서 아들을 의자에 앉게 하고 가지고 있던 알코올과 크림으로 아들 태원이 다리를 마사지를 해주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산티아고에서 온 친구가 알코올로 마사지 하고 벨기에 아가씨가 직접 태원이 발과 다리에 통증억제 크림을 바르고 마사지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통증치료약도 소개하며 커피를 사는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런 일도 있는 행복한 날이었다. 기쁘고 행복한 날이었으나 오후에 아들과 작은 소통의 불협화음이 발생한 것을 나는 크게 반성한다.

 

<순례길>

여러 상황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정말 다양하다. 날이면 날마다 그 걷는 구간마다 순례길은 다르고 특징이 있고 어려움이 있다.

오르막이면 오르막 나름대로, 평원이면 평원 나름대로, 오솔길이면 오솔길 나름대로, 차도면 차도대로, 산실이면 산길인대로, 흙길이면 흙길인대로, 돌길이면 돌길인대로, 동네길이면 동네길인대로, 내리막이면 내리막인대로, 흙탕길이면 흙탕길인대로, 오로지 극복하고 반드시 걸어야할 길로 내 앞에 다가온다.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사람을 만들어 간다.

그러기에 주님을 만나게 하는 길이요, 신비의 길이라고 할수있다.

가축 똥냄새 나는 길이면 그 길대로 매연이 넘치는 도시 길은 도시 길대로 다양한 순례길이며 다양한 언어, 다양한 피부색, 다양한 국가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조화를 이루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길이기에 후반 들어 더욱 매력을 느끼며 새삼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길이 된다.

 

<순례길에서의 마지막 주일>

순례길에서의 마지막 주일이라고 생각하니 가심이 설렌다. 무사히 무탈하게 여기까지 올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으니 주님께 감사드린다.

벌써 마지막 주일이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걱정과 설레임이었는데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으니 정말 가슴이 설렌다.

하지만 안심할 때는 아니라고 본다. 교만해서는 안 된다. 주님은 아시겠지만 주님은 늘 가까이 하시겠지만 인간인 나로써는 마지막 주일에 마음을 다잡는다. 더 이상 흥분하지 말아야 하겠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일미사 (7:30)에 참여한다. 비가 오는데 찾아간 성당, 가면서 아들이 짜증도 났었다. 미사시간을 중요시 여겨 알아보려고 갔었는데 소통의 문제가 생겨서 점심시간에 아들과 작은 충돌이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니 만약에 지금과 같이 비가 많이 오는 상황에서 아들이 미사시간을 알아보지 않았으면 어떻게 했을까? 비도 많이 오는데… 아들이 미사를 중요시함은 더욱 감사하게 생각되었다.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도록 만든다. 나는 미사 전에 아들과 악수를 하며 화해를 하고 미사에 참여하였다. 미사 중에 순례자들을 위해 Sarria 신부님께서 축성도 해주시고 미사 후에는 까미노 친구들 다 나오라고 해서 제대를 중심으로 모여 놓고 일일이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하며 물어보시며 친절하게 맞이 해 주신다. South Korea 라고 하니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를 한국말로 하시면서 환영해 주시고 축성해 주셨다. 미사 후 나와 만남의 악수를 하시며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를 한국말로 하시며 아들과 함께 왔다고 하니 불러서 사진도 함께 찍으시며 잘 마치라고 안수해 주셨다. 감사드립니다.

<감사, 감사, 감사>

순례길에서 감사, 감사, 감사함을 느낀다. 아침에 일어나 이제까지 다리에 있었던 통증이 사라진다. 감사한다. 눈을 뜨고 무사함에 감사한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감사한다. 길을 걸으면서 하루일정을 끝내고 감사한다. 나는 순례길에서 늘 감사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오늘 길을 걸으면서 감동이 메말라 있음을 느낀다. 눈물을 흘리고 싶다. 하지만 눈물을 흘릴수 없다. 감동, 감동 그자체. 행복하다. 여유를 즐기고 있다. 너무 행복하다. 울고 싶을 정도로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그러나 눈물이 없다. 왜 그럴까? 그러나 감사한다. 그리고 또 나는 감사할 것이다. 순례길을 걸으며 감사하는 마음은 가면 갈수록 더욱 짙어진다. 나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에게는 감사하는 마음을 키워주는 길이 되었다고.

 

<숨을 헐떡이고 오르는 순례길>

오늘 숨을 헐떡이며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른다. 오르면서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어렵게 숨을 몰아쉬며 오르막을 오르는데 위에 올라서면 몸이 쫙 퍼지는 느낌을 느끼지 않는다.

국내에서는 조그만 오르막을 올라도 숨을 헐떡이며 오르면 다음날에는 퍼지곤 했다. 기진맥진하곤 했다. 이곳 순례길에서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 체력인가. 건강인가. 아니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오르는 오르막의 정상에서 기진맥진함이 이곳에서는 없다. 이유가 무엇일까를 오늘은 생각하게 한다. 공기, 산소, 맑고 깨끗함 때문일 것이다. 신기하고 고맙다. 그러기에 나로 하여금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 한다.

 

<관대함을 시험하는 무대>

관대한다고 하면서 왜 관대하지 못했는가? 더욱 관대해야 하겠다. 오늘 있었던 아들과의 관계에서 나는 반성 반성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관대하여야 한다. 왜 그러지 못했을까? 나만을 고집하고 나만의 감정을 삭히지 못하고 표정으로 보였다. 좀 더 수양해야 한다. 좀 더 마음을 넓게 가져야한다. 사랑이 메말라 있음이 아닌가. 인내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절대 또 같아지면 안 된다. 다시 다짐한다. 순례길 걷기 이후에 관대해져야 한다. 내려놓아야 한다. 관대하지 못한 것은 여유가 없는 탓이기도 하다. 이렇게 외롭고 슬펐던 적은 없었다. 아들을 믿자. 아들을 사랑하자. 아들을 나와 같이 만들려고 하지말자. 아들을 이해하자. 이해하려고 노력하자. 아들아 오늘 일이 미안하다. 내가 관대하자고 마음을 가졌는데 오늘이 그 시험의 날이다. 그런데 그것을 참아 넘기지 못했구나. 나는 여기 오기 전까지는 관대하고 자식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생각해보니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이 길부터가 순례길의 3단계 시작인가?>

나는 이렇게 구분하고자 한다.

오늘 120km대 시작한 Triacastela 부터가 산티아고 순례길의 3단계라고 이름하고자 한다. 오늘 이 길을 걷는데 소름끼치도록 행복하다. 감동적이다. 평탄하지만 특징이 있다. 오르막길이 몇번 있지만 느낌이 많다. 산길, 가축의 똥 냄새나는 동네길이지만 매력을 느낀다. 새소리를 감상하며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기쁨을 느낀다. 어려움이 적고 마음의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 길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만나는 사람들(3명)에게서 친구로서, 동행자로서 사람 내음을 느끼게 하는 길이었기에 환희와 기쁨을 접하는 길이었다. 바로 3단계 시작이라고 이름 하는 이유가 있다.

 

<드디어 감동의 울음을 터트리다>

오늘 순례길을 걸으며 오르막 정상에 오르니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오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내려다 보이는 풍광, 아들과 함께 걷는 감정, 아내와 딸을 생각하고 정말로 오늘길이 행복하고 기쁨에 차서 나는 드디어 감격의 울음을 참다 참다 못해 울음을 터트렸다.

뒤 따라 오는 아들이 알아차릴까 참고 참으며 아들 몰래 울음을 머금고 있다가 그만 울음이 나오고 말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두 번째로 터진 울음이다. 565km남은 대평원에서 행복과 풍광에 감격하여 첫 번째 눈물을 흘렸다.

오늘의 순례길에서는 그저 기쁨, 환희, 행복에 복받쳐 나오는 감동의 울음이다. 정말로 감정이 메말라 있는 나로써도 어쩔 수 없이 감정의 울음을 터트리게 만드는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이처럼 사람을 울리고 행복한 감정을 느끼게 하고 감동케 하는 순례길을 걷기위해 참 잘 왔구나 생각한다. 아내와 함께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아쉬워하는 하루였다.

 

<두번째 카메라 렌즈를 닫다.>

산티아고가 126.74km 남은 길을 걸으며 나는 두 번째로 카메라 렌즈를 스스로 닫고 말았다.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카메라의 셔터를 계속 눌러대다가 갑자기 다 담을 수 없었다. 이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인간이 만든 카메라에 어떻게 다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창조주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565km남은 지점에서도 풍광의 아름다움을 나는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다. 오늘과 같은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을 수 조차 없어 렌즈를 닫고 말았다. 다만 마음에, 가슴에, 눈에 담도갈 수 밖에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두 번째로 카메라 렌즈를 닫고 말았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볼수 있고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심에 감사합니다.

오로지 이 말 밖에는 할 수 없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카메라의 렌즈를 들이대기 힘든 풍광을 마음껏 즐기고 마음에 품고 가련다.

 

<눈 앞에 보일 때가 가장 힘들다>

“그 날, 그 날 목적하는 마을이 눈에 보일 때가 가장 힘들다” 이는 아들의 말이다.

아마도 순례자의 공통적인 마음일 것이다. 이는 나도 그러니까 말이다.

오늘도 절뚝거리는 발로 오늘의 순례길을 걸으며 Sarria 동네가 앞에 보이면서 아마도 2시간정도는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지점에서 아들은 참다못해 이런 말을 한다. 발이 얼마나 아프면, 고통스러우면 그런 말을 할까? 나도 똑같은 생각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정말로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하며 순례길에 참여했다고 하지 않던가. 정말 가고자하는 마을이 눈에 보일 때가 가장 힘들다. 그러나 어쩌란 말이냐. 빼박이 아닌가(갈 수도 없고 안갈 수도 없고). 갈수밖에 없는 길이기에 오늘도 걷고 내일도 걷는다. 옛 성인이 주님의 뜻을 전파하기 위해서 걸은 길을 우리는 왜 걷는가? 바로 성인의 뜻을 느껴보고 자기성찰을 위해 걷는 길이 산티아고 순례길이기에 함께 걸으면서 나 자신을 바라보자.

힘들다! 힘들다!

우리 주위에 늘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있다.

또 운동경기를 보자. 막판에 지구력이 부족하여 패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대학입시를 앞둔 수험생들을 보라. 시험일 임박해서 정리할 때 지쳐있거나 지구력이 부족한 경우에 실패한다. 순례길에서도 우리는 보이는데 힘들어 터덜터덜 걸어간다면 제대로 도착할 수 없어진다. 그렇다고 힘들어! 힘들어! 하면서 걷는 다고 더 나아지는 것이 있을까? 오히려 더 지치게 된다. 이제 산티아고 입성 전 4일이다. 보일 때가 힘들더라도 막판에 힘을 가해야하고 막판에 몸 관리를 잘하지 않으면 중도 포기가 나오게 된다. 보일 때가 더 힘들더라도 인생길이나 순례길이나 지구력을 발휘할 때가 바로 이때다.

 

*순례길을 걸으려면(요령)

1.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2. 코스 선택이다. – 철저한 준비

3. 기간을 충분히 잡아라.

4. 까미노 친구들의 연합 가입 / 원태일의 산티아고 순례길 (전자책) / Camino Pilgrim 다운 / Camino Corea 가입

5. 짐을 줄여라

6. 목적과 목표를 정하여 걷는다.

7. 스틱을 사용하는 방법을 익혀라

8. 자고 먹고 배설하는 습관을 만들어라.

 

<아들에게 쓰는 편지>

*순례길에서 아들과의 관계의 오점을 남기며…

“못해 미안하다. 잘 할께 했으면 좋았으련만. 어디 다녀왔니? 고생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찾고 헤맸잖아. 내가 쫓아가지.”

저녁 밤새도록 나의 옹졸함에 그와 깊은 오점을 찍었구나

네가 말했잖아. 무사히 모시고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어머니께 무사히 넘기는 것이 네 임무다. 정말 수고했다. 아버지도 나이 먹었지? 나는 너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그렇지 못하였구나 하고 반성하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보고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벌써 2번이나 순례길에서 너와의 관계에서 오점을 찍었구나. 좀 더 관대했어야 했고 좀더 이해했어야 했고 인내심을 발휘했어야 했는데...

내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이 아프다. 그 후 밤새도록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그래도 아들에게 자상하고 이해심이 많은 아버지로서 역할을 다하고 사랑이 충만한 아버지로서 너희들을 키우려고 노력하였고 그렇게 했어야 하련만 나이는 어쩔 수 없나보다. 옹졸하고 좁고 이해심 부족하여 너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구나. 너는 그토록 열심히 노력하였는데, 예를 들면 미사시간 알아보려고 아픈 다리 이끌고 계단 오르며 비를 조르륵 맞고 다녀왔는데 내가 오히려 화를 낸 것은 나만을 생각하는 아버지로 변했음을 증명하는 오점이구나. 이번 순례길 여정에서 2번이나 그랬구나. 지난번에도 그랬고.

그토록 1인 5역 통역, 정리, 살림, 안내, 숙소 정보탐색 등을 하며 고생했구나. 그저 따라다니며 그것도 제대로 따라다니지 못하면서 너를 불편하게 하다니 그저 미안할 뿐이다.

관대하고 겸손하게 살려고 그리고 그렇게 너희들에게 대하고자 노력하겠다. 오점을 찍는 행동을 한 것도 너에게서 없어지지 않으련만 그래도 나는 지우려고 노력하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아버지/40년 동안 교직의 길을 걷다가 정년퇴임하고, 대립토론 교육을 전파하는 70대 교육자)

(아들/호주 유학을 다녀와서 직장을 접고, 아버지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30대 젊은이)

카페에서 잠시...
122.600km 남았다는 표지석이 순례길을 안내한다
119.665km남았네
벨기에 한국 스페인 친구들과 함께

 

도로에도 순례길을 안내하는 표지를...
미사후 순례자들에게 안전을 기원해 주신 신부님